“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이 시 한 줄로 우리 마음에 영원히 남은 천상병 시인. 하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시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최근 읽고 있는 나의 인생책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천상병 시인이 “세상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에 가난했다”는 대목을 읽고 어떤 사람이었는지 찾아봤다. 정말 그럴까? 시인의 가난은 단순히 ‘선택’의 문제였을까?
(물론 세이노 선생님이 본론 들어가기 전 서두 예시로 언급하신 거지 천상병 시인이 가난했냐 어쨌냐가 가르침에서 중요한 건 절대 아니다. 그냥 내 쓸데없는 궁금증인데 이런거 찾아보면 예전에는 사실 시간 낭비였다. 요즘에는 AI가 뛰어나서 자료 검색에 글까지 이렇게 다 만들어주니까 해본거.)
즉 아래는 조사부터 작성까지 AI가 수행한 내용이다.
19세부터 시작된 시인의 길 ✍️
천상병 시인은 19살이던 중학교 5학년(???), 동인지 『죽순』에 시 「공상」을 발표하며 처음 시인으로 활동했다. 1949년부터였다.
서울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1952년경에는 이미 추천이 완료되어 그는 기성 시인 대접을 받았다. 놀랍게도 23세에 이미 문단에서 인정받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서울대 상과대학 출신에 기성 시인이면 그럭저럭 살 만했을 텐데?
원래부터 ‘돈’과는 거리가 먼 인물
2년 동안 부산시장 공보비서로 일한 것이 전부였던 천상병은 늘 가난했다.
공무원까지 했는데도 가난했다는 게 포인트다. “거무스레한 얼굴에 자주 껌벅이는 눈, 더듬거리는 말, 줄 담배와 폭음, 애교 섞인 용돈 수금(?) 등으로도 고은·김관식과 함께 한국문단 3대 기인으로 불릴 만했다.”
이미 이때부터 조짐이 보였다. 천상병은 술을 무척 좋아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술을 마셨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와 어울려 다니면서 마셨다.
문단을 떠도는 ‘천 원만’ 시인
부산 공보비서직을 그만둔 후 천상병의 삶은 더욱 자유분방해졌다. 서울상대 출신이지만 세속의 욕망을 접고 문단 주위에서 지인들에게 천진스런 행동으로 악의 없이 손을 내밀고 “천 원만”을 얻어 근근히 살아갔다.
당시 “천 원”이면 막걸리 한 사발 값이었다. 천상병은 정말로 하루하루를 막걸리 한 사발로 버텨가며 시를 썼다.
세이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분명 ‘자기 하고 싶은 일’인 시 쓰기를 선택한 대가였으니까.
그런데 1967년,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이 일어났다.
동백림 사건 – 조작된 간첩단 사건의 진실 🚨
1967년 박정희 정권이 터뜨린 동백림 사건. ‘동백림’은 동베를린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당시 동독 수도였다.
박정희 중앙정보부는 1968년 7월,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동백림 거점 북괴 대남 공작단사건’이라는 어마어마한 공안사건을 발표했다. 서독거주 작곡가 윤이상, 파리거주 화가 이응로 등 34명의 예술인과 유학생이 포함되어 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문제는 여기에 천상병이 엮였다는 것이다.
천상병이 왜 간첩사건에?
친구 강빈구에게 막걸리값으로 5백원,1천원씩 받아 썼던 돈은 공작금으로 과장되었다. 서울대 동기였던 강빈구가 동백림 사건 피의자로 체포되면서, 천상병도 함께 끌려간 것이다.
코미디 같은 혐의들
검찰은 그가 ‘생업’으로 지인들에게 “천 원만” 하고 얻어 쓴 돈을 협박하고 갈취한 것으로 몰았다.
구체적인 혐의는 이랬다:
절친한 대학친구를 간첩으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하여 2년 동안 매주 1, 2회씩 처음엔 6,500원을, 그 다음엔 100원 내지 500원씩 갈취했다는 것이다. 2년도 채 안 되는 동안 매주 한두 번씩 상습적으로 뜯어낸 돈의 합계가 36,500원이라? 간첩신고 협박에 100원씩, 많아야 500원을 갈취했다? 이것은 코미디였다.
정말 말이 안 되는 혐의였다. 하루 종일 친구한테 막걸리 한 잔 얻어먹는 걸 ‘갈취’라고 했으니까.
지옥 같았던 고문의 시간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서울 중심부에 있는 그들의 본부인 그 무시무시한 지하실로 그를 끌고 갔을 때였다. 그는 거기서 물 고문과, 성기에 전기 충격을 가하는 전기 고문을 받았다.
천 시인은 정보부에서 세 차례나 전기고문을 당해 혼절한 상태로 조사를 받고, 재판부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6개월간의 고문과 감옥생활. 그 결과는 참혹했다.
고문이 남긴 치명적 후유증 💔
이 때의 전기 고문으로 그는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더 심각한 건 정신적 후유증이었다. 오랜 세월 자기자신의 몸관리를 할 수도 없이 혼자서 생활했던 탓도 있다면 있겠지만, 육십칠 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세 번의 전기고문 등 갖은 고초를 겪어 남편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고문의 깊은 후유증에 시달리며 술타령으로 나날을 떠돌던 그가 마침내 1971년 실종된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유고시집’
친구와 친척들은 여러 달 동안 백방으로 그를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행려병자로 사망하여 아무도 모르는 어디엔가에 파묻힌 것으로 결론을 내린 그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의 작품들을 모아 유고 시집을 발간했다.
정말 기막힌 일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유고시집을 낸 것이다.
병명은 영양실조와 정신황폐증이었다. 몇 개월간 병을 앓고 부산집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날 저녁, 길에서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정신병자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운명을 바꾼 만남 👼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심한 자폐증상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대학 때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의 방문을 받은 뒤로는 그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목순옥은 간호사였다. “그래, 도와 드리자”라는 결심을 했다. 앞으로 어떤 고통과 괴로움이 있을런지 하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1972년 두 사람은 결혼했다. 김동리 선생님의 주례와 신봉승씨의 사회로 모든 사람의 축복의 박수를 받으며 우리는 그렇게 출발을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가혹했다.
결혼 후에도 계속된 경제적 어려움
천상병 시인이 돈을 거의 벌어올 수 없는 상태였던데다가, 목순옥 여사가 생계를 위해 했던 일들이 잘 되지 않아 결혼 후에도 한동안 생활고는 면치 못했다고 한다.
다만 그에게는 스스로를 부양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철없는 어린애 같았고 어린애처럼 약했다.
남편이라기보다 어린애를 돌보며 보살피는 그런 마음으로 나는 살았다.
이제 천상병의 가난은 ‘선택’이 아니라 ‘불가항력’이 되어버렸다.
찻집 ‘귀천’의 기적 ☕
전환점은 1985년에 왔다. 생활고에서 벗어난 것은 이후 천상병 시인의 친구였던 강태열 시인이 빌려준 300만원으로 1985년 찻집 귀천을 개업하면서부터였다.
찻집 이름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잡고”로 시작되는 천 시인의 대표작 ‘귀천’에서 따왔다.
드디어 목순옥 여사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목씨는 생전에 ‘귀천’을 두고 “배가 고팠던 우리 부부에게 밥 문제를 해결해준 삶의 터전”이라고 말하곤 했다.
천 시인은 생전에 “나는 부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한국 유일의 시인이다 …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 내 아내인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찻집 귀천의 변천사와 현재 📍
1호점의 역사: 1985년에 문을 연 맨 처음 귀천은 인사동 메인 거리의 골목도 아닌 것 같은 어둑한 골목 입구가 있는 옛날 건물에 있었다. 그러다가 2005년에 그 자리에 빌딩이 들어선 후에, 옛 자취는 없어진 새로운 귀천으로 2010년까지 운영되었다.
주인의 마지막: 2010년 8월 시(時) 귀천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귀천하셨다. 25년간 운영되던 1호점은 주인을 잃고 문을 닫았다.
현재 운영 상황:
▲ 인사동 2호점: 목 여사의 조카인 목영선(46.여)씨가 운영해 온 인사동 귀천 2호점은 계속 운영한다.
▲ 파주 헤이리마을 3호점: 경기도 파주 헤이리마을에 귀천 3호점인 카페귀천이 있다. 천상병 시인을 기리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시인의 서재에 꽂혀있던 실제 서적들과 천상병 시인의 육필원고 등 유품들을 카페귀천 내 천상병문학관에서 볼 수 있다.
매일 오전 11시 – 오후 8시 영업하며 애견동반도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천상병 시인의 가난은 두 단계로 나눠 봐야 한다.
1단계 (1967년 이전): 세이노의 말처럼 자기 하고 싶은 일(시 쓰기)을 선택한 결과였다. 서울대 출신 공무원이었는데도 2년 만에 그만두고 문단을 떠돌며 “천 원만” 얻어먹고 산 건 분명 본인 선택이었다.
2단계 (1967년 이후): 다른 원인이 추가되었는데, 국가기관의 불법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선택이 아니라 피해였다.
사실 뭐 간첩사건 고문이 없었어도 1단계의 삶을 계속 살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암튼…
천상병 시인의 삶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하고 싶은 일’과 ‘먹고 사는 일’ 사이의 선택이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 그리고 국가권력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지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 모든 고난 속에서도 세상을 아름답다고 노래한 시인. 그의 순수한 영혼이 전하는 메시지가 더욱 깊게 와닿는다.